이번이 3번째 온 그랜드캐년 방문이다. 처음은 한국에서 온 가족들을 위한 접대 여행이었다. 두번째는 아들녀석을 위한 여행이었기에 모두 내가 즐길 틈이 없었는지 광활한 그랜드캐년을 호젓하게 느낀 기억이 없다.
그랜드캐년을 찾는 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역시 두번 다 그저 믿기지 않는 눈앞의 광경을 보다 돌아서곤 했다.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보고 싶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림인 ‘내려다 보는 그랜드캐년’ 말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그랜드캐년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물론 저 아래 세상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도 한몫 했다. 더 나이들기 전에, 다리에 힘 있을 때 한번 내려가보자 했다.
그랜드캐년,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Bright Angel Trail)로 들어서다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은 그랜드캐년 사우스림(South Rim)의 Bright Angel Lodge에서 출발하게 된다.
나의 목표는 왕복 6시간에서 9시간 걸린다는 하루코스로 가능한 인디안 가든이다. 거의 밑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출발하게 되는 지점은 6708피트이고 내려가게 되는 목적지인 인디안 가든은 3800피트로 왕복 9마일이다. 산행이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인데 반해 이곳은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Very Difficult 코스라는 안내는 겁부터 준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내리막은 신나게 경치를 감상하며 여유있는 즐거움에 빠지게 한다.
1.5마일을 내려가니 절벽에 기대어 서 있는 운치있는 건물이 보였다. 쓰여있기는 레스트 하우스 (Rest House) 였으나 화장실이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행히 이곳에선 물도 받을 수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또는 위로 위로 가다가 잠시 쉬는 쉼터이다.
내리막과 오르막길
길을 오르는 이들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쉰다. 어젯밤 아래 캠프그라운드에서 지낸 사람들의 배낭은 오르는 이들의 발걸음에 더 무게를 꾹꾹 눌러 보태는듯 하다.
이길 위에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산객보다 더 오래전부터 다녔던 뮬(Mule)이라 부르는 나귀들이다. 뮬을 만났을 때는 낭떠러지가 아닌 트레일 벽쪽으로 붙어야 한다.
내려오면서 확연히 변하는 것은 걸어가고 있는 땅의 색깔이다. 내가 내려갈수록 오랜 세월의 시간을 밟고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내 눈높이에서 옆으로 그리고 위로 올라가며 지층이 말해준다.
드디어 그랜드캐년 밑에 내려왔다
3시간 반만에 목표로 한 인디언 가든에 내려왔다.
캠프그라운드와 가든이라 이름 붙일만큼 작은 숲이 꾸며져 있지만 무언가 신기하게 다른 것이 있을 것 같던 기대와는 다르다. 하지만 올려다보는 그랜드캐년은 이곳에 내려오지 않았다면 볼 수 없는 각도로 눈에 들어왔다.
이제 다시 올라가야만 한다.
점심으로 싸가지고 온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내려온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 올라간다. 위로 오르는 길은 내려올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늦가을 날씨임에도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얼굴은 낮술 몇 잔 한것처럼 붉게 타오른다.
내가 알게 된 것
한발 한발 오르는 걸음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내려오는 길의 두배의 시간을 예상해야 한다는데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내려올 땐 몰랐던 새로운 경치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끝만 보이기 시작했다. 전혀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이 무섭게 먼 높이에 내가 가야만 하는 곳이 있었다. 그래도 4시간반에 걸쳐 내 허벅지는 무게를 더해가며 나를 다시 제자리로 옮겨다 놓았다.
결국 내가 있던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은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꾸준히 그저 걸으며 까마득한 아래로 내려갔고 다른 방법이 없이 그저 또 걸음을 내딛으며 다시 올라온 것이다. 시간을 들이며 꾸준히 걷고 또 걸은 것이다.
마치 캐년에 여러 지층들이 오랜 시간동안 만들어 놓은 것처럼 말이다. 자연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시간이 모든 것을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수백년 수천년 물이 흐르고 흘러 캐년을 만들어 놓는다. 나무가 몇십년 몇백년을 자라 나이테를 그리며 아름드리 나무가 된다. 그러면서 또 나무는 많은 세월 씨를 퍼뜨려 숲을 만든다. 그런가하면 바람은 모래를 날리고 날려 모래언덕, 듄(Dune)을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 보이는 자연보다 그 속에 지나온 시간이 더 무섭지 않은가.
오늘의 나의 걸음도 결국 8시간 가까이 쉼없이 걸으며 나를 그랜드캐년 아래로 데려갔고 또 다시 제자리로 올려다 놓았다. 그러니 시간을 쌓으면 이룰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싶다.
다시 올라와 뷰포인트에 보는 그랜드캐년은 내가 분명 내려갔다 왔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스크린 속에 멈춰버린 영상같다.
by 50plus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