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이 지은 ‘메밀꽃 필 무렵’의 유명한 한 구절이다. 봉평의 산과 들을 채운 메밀꽃은 달빛 아래 소금처럼 반짝이는 대신, 햇살 아래에서 벅차게 넓고 가득했다. 꽃이 팝콘처럼 터지는 메밀밭이 길 양쪽 여기저기에 있었다.
영동고속도로에서 평창 ic로 들어선 뒤 우회전하면 얼마 가지 않아 금세 봉평에 도착한다. 메밀막국수집이 많은 시내구간을 통과하지 않고, 왼편에 펼쳐지는 강을 따라간다. 다리를 건너 왼편으로 향하면 물레방앗간이 나온다. 소설 속 허생원과 성씨 처녀가 젊은 날 하룻밤의 시간을 보낸 그 물레방앗간을 재현해 놓은 곳이다. 그리고 물레방앗간 뒤로 넓게 펼쳐진 메밀꽃밭을 만난다.
이곳이 아니더라도 봉평의 여기저기엔 메밀밭이 참으로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곳의 메밀밭 안에는 원두막이며 조형물이 있어 보는 즐거움이 좀 더 있다. 광활한 메밀밭에는 온통 메밀꽃이 가득하다. 그 사이로 흙길이 이어져 한참을 걸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요즘 도시에선 흙길을 밟는 일조차 낯선 세상이구나 싶다. 시골길을 걷듯 흙먼지가 살짝 올라오는 길을 따라 메밀꽃밭 사이로 그렇게 걸었다.
곡식이 익는 뜨거운 한낮의 가을볕 아래에서 사람들은 더러 걸었다. 햇볕을 가리는 양산을 쓰고, 마스크도 썼지만 다들 웃었다. 코로나 시국에서도 꽃은 피고, 꽃을 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꽃은 피어나므로, 우리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팬데믹 터널에서도 웃으며 걸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레방앗간을 지나면 이효석문학관이 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언덕을 오른다. 거의 다 올랐을 무렵 매표소를 지나면 바로 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봉평의 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저기 흰 메밀밭도 보이고, 낮은 집과 멀리 산까지도 한눈에 들어오니 그림 같다. 시야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높지 않은 언덕이었으나 숨을 고르고, 심호흡을 했다.
이효석문학관 안에서는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육필원고, 그의 글이 실린 예전의 잡지들이 보인다. 그리고 작가의 연대기와 함께 그가 좋아했던 물건들이며 소소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시절에 신문물을 먼저 접한 지식인들이 더러 그러했듯 작가 역시 커피, 버터 등 서양문물과 음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작가지만 그에 못지않게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도 유명하다. 나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그의 이 작품을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꽃이 지고, 푸르던 잎도 낙엽이 되어 땅에 구르는 가을이지만 작가는 그 낙엽을 쓸고, 태우며 ‘가을은 생활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그 상념을 글로 적은 원고들도 있었다.
소설 ‘메밀꽃필 무렵’은 1936년 작가가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할 시기 발표한 작품이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은 이효석 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의 글에서 묘사된 봉평의 풍경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담긴 고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고서도 추억이 담긴 고향은 불쑥 그립고, 때때로 어제 본것처럼 선명하기도 하니 말이다.
작가의 생으로 채워진 이효석 문학관의 전시실 옆의 시청각실에서는 그의 일대기와 작품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었다. 어르신 몇 분이 앉아 영상을 보고 계셨다. 중간중간 끄덕끄덕 하시며 집중하고 계셨는데 참 보기 좋았다.
메밀꽃이 피는 시기여서 일까, 아니면 평소에도 사람들은 더러 이렇게 오는 것인가 알 수 없으나 평일의 문학관에는 계속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초로의 부부도 있었고,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들도 계셨다. 뛰어다니는 아이를 주의 주고 있는 젊은 부부도, 모녀인듯한 일행들도 더러 보였다.
메밀에 꽃이 핀다. 메밀꽃이 달빛 아래 소금처럼 반짝인다는 글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찾아든다. 마스크를 쓰고, 아직 팬데믹의 터널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이 피어나니, 글이 사람들을 이끈다. 어쩌면 글이, 꽃으로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글 : 전명원 (작가, 에세이스트) 저서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