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무렵 고향을 떠났다.
그 당시 나의 꿈은 어른이 되면 무조건 큰 도시로 나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그런 때였다. 내 생각 때문이었을까? 고향인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고 대학과 직장생활로 서울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은 더 멀리 와버려 20여 년을 미국에서 살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하루 왕복 4시간여 걸리는 등하교가 힘들다는 핑계로 시작된 것이 내 객지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그때는 부모 형제와 내가 자라며 보낸 수원이 그저 작고 특별할 것 없는 소도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막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던 20대에게는 내가 딛고 서있던 그곳에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던 때였다.
이제 매년은 아니어도 몇 년에 한 번씩은 한국, 정확히 말하면 수원을 가게 된다. 몇 년 전엔 아이를 데리고 가서 엄마의 고향 투어를 시켜주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저 한 번씩 들르는 고향에서 다른 것을 느끼진 못했다. 추억을 확인하고 바뀐 것들을 보며 여전히 고향에 계속 살고 있는 동생과 신기해하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었다.
로마를 보고 오니 내 고향이 다르게 다가왔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의 마지막 여행은 미국사는 친구 몇 명과의 로마여행이었다. 처음은 아니었으나 25년 여 만에 간 로마는 여전히 웅장했으며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간 덕분에 감동은 더 깊었다. 여전히 인종 종합전시장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스페인 광장이며, 젤라토라도 하나 들고 앉아있어야 할 것만 같은 트레비 분수 앞의 계단과 조각상들도 멋졌다. 아직도 어떻게 둥근 돔으로 만들어 정중앙에 구멍을 내었는지 건축양식이 미스터리라는 판테온도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가 하면 8년간의 공사로 무려 서기 80년에 만들어졌다는 야외 원형 경기장인 콜로세움은 가늠이 되지 않을 세월에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고대로마의 건축물이 가득한 도시는 골목을 돌아 걷다 보면 나오는 것들 그 자체가 모두 유적이었다. 물론 엄청난 관광객들과 함께 몸을 부딪치며 다녀야 했지만 조상을 잘 만나 이렇게 관광수입을 올리는 로마가 부럽기까지 했다.
로마여행을 마친 나는 바로 수원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내 여행이 로마와 함께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가족을 만나러 가던 고향이 아닌 내 눈은 관광객의 시각 그대로였다. 마치 여행을 나설 때 잊지 않고 챙기는 선글라스를 아직 벗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또 여행의 감동을 가득 느끼겠다는 듯한 준비자세로 배낭을 그대로 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 어린 시절을 채워준 수원화성
그래서인지 내게 고향, 수원은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그곳은 로마와 같이 유적지로 가득한 곳이었다. 작은 소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성곽 안팎은 걷기만 하면 만나게 되는 유적지들이 천지였다.
어린 시절에는 흔히 그 세계가 전부로 생각하듯 나 역시 서울처럼 그리고 수원처럼 어느 도시에나 다 남문과 함께 4개의 성문을 가진 성곽이 있는 줄 알았다. 그 당시 7,80년대의 수원화성은 아직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않을 때였고 대부분의 유적지는 더욱이 자연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가 끝나고 매일 버스를 기다리던 정류장은 바로 남문으로 불리는 팔달문 앞이었다. 당시 남문은 다운타운이었으며 없는 것이 없이 가장 새로운 것이 빨리 들어오는 핫플레이스였다. 그 신세계가 터질 듯이 비집고 들어오는 자리에 점점 작아지고 바래지던 남쪽에 있는 성문이었다. 하지만 수원화성이 지어질 때 실제 정문은 북문인 장안문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성곽은 남문이 정문이지만 수원만큼은 화성을 계획한 정조가 북쪽에서 들어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어릴 때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겪고 훗날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을 화산에 만들면서 그곳의 주민을 화성, 즉 지금의 수원으로 이주시키며 만들어진 도시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계획된 신도시인 셈이다. 그렇게 1794년 1월에 시작해 10년은 걸릴 거라던 수원화성의 공사는 채 3년도 안 걸려 완공되었다 한다. 바로 철저한 계획이 있었고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등 건축을 위한 장비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임금 지급과 공사 책임제 등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또 수원화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성에서는 볼 수 없는 성문밖으로 이중의 반달 모양의 옹성이 있다. 위에서 보면 항아리를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군사적 의미가 큰 방어시설이다. 수원화성은 위치적으로도 한양과 아래 지역을 연결하는 상업 도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원 깍쟁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가게를 하던 상인을 가게 쟁이라고 하던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학생이 되어 활동하던 미술반에서 매주 나가는 야외스케치 장소는 학교와 가깝던 서쪽의 화서문 주위 성곽이었다. 그때 당시 대부분의 나의 그림 주제가 되어준 것은 기와지붕들, 오래된 돌담으로 된 성곽, 돌과 벽돌로 짜 맞춰진 아치 모양의 문들이다. 아마 지금도 어디엔가 돌계단 귀퉁이에라도 내가 털어내던 수채화 물감이 살짝 배어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내 사춘기 여고시절까지 야외스케치와 수원화성의 유적지들과는 일상이었다. 사계절을 도화지에 모두 담아내던 사춘기 소녀는 그렇게 미대에 진학했으니 그 풍경들이 나의 진로의 뿌리를 함께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수원에는 화성 말고도 정조가 행차 때마다 머물던 임시거처인 행궁이 성안에 있다. 왕은 수원화성을 여러 차례 방문할 때마다 이곳을 이용했다고 한다. 또한 정조의 어명으로 다시 지어진 수원향교 역시 조선시대 향교 중 그 규모가 크다고 한다. 수원의 역사적 유적지들은 정조와 뗄 수 없으며 그것은 효로 이어지니 수원이 바로 효의 도시인 이유이다.
물론 기원전 고대 로마의 역사까지 간직한 도시, 로마와 비교하기에는 수원화성의 역사는 짧다. 하지만 우리 수원화성이 간직하고 있는 이야기는 어느 역사보다 더 깊고 놀랍다. 그리고 그런 유적지들이 가득한 속에서 보낸 내 어린 시절에는 아마도 나의 감성을 만들어가는데 한 부분이나마 더해졌을 것이다. 지금도 내 추억 속엔 짓누르듯 어마어마한 성벽이 아니라 작은 키에 발끝으로 서서 고개 내밀면 바깥세상이 넘겨다 보일 듯하던 높이의 성곽이 그려진다. 또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의 웅장함보다 따듯함이 느껴지는 기와지붕과 단청 그리고 세월이 그대로 묻어날듯한 나무기둥들이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한다. 이런 곳이 내 고향이어서 자랑스럽고 내 인생의 소중한 감성이 만들어지는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곳, 내고향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