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전시회로 출장 간다는 남편을 따라갔다. 내 차를 몰고가, 남편을 전시회장에 내려주고는 팔공산, 군위, 상주, 김천, 그리고 칠곡까지 다녀왔다. 다시 대구로 돌아왔을 때는 석양이 물들기 시작하는 즈음이었다.
전시회장에서 거래처와의 일을 끝내고 온 남편과 만났다.
남편은 나름 믿거나 말거나 미식가인데, 밥은 햇반이 전문이고, 반찬은 일생 남이 하는 반찬만 먹인 결과 미각 잃은 장금이가 되었다. 오죽하면 우리 가족은 우스갯소리로 말하길, “죽으면 꼭 화장합시다. 그간 먹은 즉석식 품 방부제가 너무 많아서, 우린 안 썩고 미라로 천 년 후 다시 등장할지도 몰라.” 하며 웃곤했다. 남편은 대구 10 미가 있다며 그중 몇가지를 꼭 먹어보고 싶어했다.
지금보다 젊던 이십 대 시절, 친한 친구가 동성동본 아가씨와 연애를 했다. 부모님이 머리에 끈 동여매고 눕는 수준이 아니라, 사생결단의 각오로 반대했으므로 둘은 대구로 도피해서 결혼식을 감행했다. 친한 친구 열명 정도가 참석한 작은 결혼식에서 신부는 많이 울었다. 모인 친구들은 드라마 한 편 찍는 사람들처럼 살짝 흥분되고, 조금 긴장하고, 많이 감동했다. 그날 이후 대구는 올 일이 없었는데 지난 이른 봄에 여행을 왔었다. 그날 공원에 피어있던 홍매화를 가끔 생각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천주교 순례성지를 다니며 스탬프를 찍고 있는데, 의외로 대구와 인근 지역에 목적지가 많아서 지난봄, 홍매화가 피어있던 대구를 떠나며 생각했다. ‘다음에 다시 와서 나머지 스탬프를 받아야겠다. ‘ 그런데 그때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이다. 남편 출장길에 따라올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호텔에서 하루 얹혀 자는 대신 오가는 길 내차로 모시고, 식사와 간식 모두 내가 지불하는 여행길이긴 했으나 1박을 한덕에 하루 종일 순례지를 돌고 밤에는 느긋하게 호텔서 쉴 수 있었다.
지난봄 가보지 못한 대구10미 중 남편이 가보고 싶어 한 곳은 찜갈비, 그리고 비빔 만두집이었다. 오래된 찜갈비 집에 브레이크 타임이 끝난 5시에 맞춰 도착했다. 홀에선 엄청난 양의 갈비를 손질하느라 분주하셨다. 대표 메뉴라는 돼지 찜갈비를 주문하고 먹다 보니, 소 찜갈비의 맛도 궁금해서 추가 주문을 넣었다. 둘 다 먹어본 느낌은 역시 대표 메뉴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돼지갈비가 훨씬 부드럽고 맛있었다. “누군가 대구의 찜갈비를 먹겠다고 한다면 꼭 돼지 찜갈비를 추천하자!” 고 했다.
대구 엑스코 주변을 걸었다. 언덕이 있는 아파트 단지도 있었고, 공원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조용한 동네였다. 만약에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엑스코 주변엔 공실인 상가도 제법 보였고, 주말인데도 열린 매장에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한가한 시간에, 한가한 동네 풍경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거리의 가로수가 온통 바스락바스락 거리고 있었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나가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다. 어둠이 내린 거리는 이내 쓸쓸해지고 고요해졌다. 우리나라말로 된 간판들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나라말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어둠이 내려앉는 거리는 , 알지 못하는, 말이 통하지 않는 다른 나라 어디쯤으로 떠나 온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다시 엑스코 전시장에 거래처 직원을 만나러 들어갔고, 체크아웃을 한 나는 호텔 로비의 카페에 앉아 글을 썼다. 로비에는 투숙객들이 들어오고 나갔다. 대부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지만 더러 외국인들도 있었다. 한때 다른 나라의 호텔 로비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던 어느 날도 있었음을 생각한다. 코로나 이전의 그 어느 날인데 내 인생에서 엄청 먼 예전처럼 느껴지기도, 어제쯤의 일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대구의 호텔 로비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두어 시간쯤은 그렇게 나 역시도 잠깐의 여행자였다.
글 : 전명원 (작가, 에세이스트) 저서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