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침, 크리스피 크림 도넛 매장에 빨간 신호등 불이 들어오면 따끈한 새 도넛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사불란하게 도넛 반죽들이 밀려 내려와 끓는 기름에 퐁당했다. 반죽이 커지며 한쪽이 튀겨지면 또다시 기계가 그것들을 뒤집어 나머지를 익혔다. 그리곤 건져진 도넛들은 또다시 오와 열을 맞춰 행진해선 시럽을 온몸에 묻히곤 했다.
빨간 신호등이 들어오면 도넛 극장에서 그렇게 도넛이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래전이었으니 우리나라에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아이들처럼 유리창 앞에서 웃으며 그것들을 보았다. 갓 나온 따끈한 도넛을 하나씩 냅킨에 집어 직원들이 맛보기로 건네주었다. 당연히 맛있을 수가 없는 도넛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무렵 딸아이는 방학 동안 미국의 이모네 집에서 영어캠프를 다녔다. 아이를 먼저 보내고 캠프가 끝나갈 즈음 나도 언니네로 여행을 갔다. 아침 일찍 언니가 운전하는 차로 아이를 캠프에 보내고, 우리 자매는 매일 크리스피 크림 도넛에 들렀다.
‘이렇게 단것을 매일 먹다가 큰일 나겠어.’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도넛 가게를 지나치지 못했다.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도넛 하나와 설탕을 뿌린 도넛을 사서 설탕을 함께 묻혀 먹으면 그나마 좀 나을 거라며 언니와 웃었다.
아이의 영어캠프가 끝나고, 나의 짧은 미국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돌아왔다. 우리나라 휴게소에서 가끔 자동 기계로 호두과자가 구워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그때의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생각했다.
도넛 극장에 빨간 신호등이 들어온다. 도넛들이 춤을 추며 기름 속으로, 설탕 샤워실로 움직인다. 직원이 웃는 얼굴로 맛보기 도넛을 하나씩 건넨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는, 언니와 함께 뜨거운 커피와 달디 단 도넛을 하나씩 먹던 아침이 있었다.
몇 년 후 우리나라에도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끔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먹었다. 그때마다 그날 미국에서의 아침들과, 그 아침들을 함께 했던 언니를 생각했다. 맛은 기억이 아니라 추억으로 먼저 오는 것이 맞다. 크리스피 크림을 생각하면 그 따끈하고 달달한 도넛 식감이 아니라 , 항상 그 아침의 우리가 먼저 떠올랐으니 말이다.
팬데믹의 한가운데를 지나오며 예매했던 미국행 티켓을 두 번이나 취소했다. 내년 봄엔 갈 수 있을까, 또다시 가끔 항공권 예매사이트를 본다. 어딘가를 보고,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저 아무 날도 아닌 이른 아침에, 동네 도넛 가게에 앉아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고, 이유 없이 큭큭 웃는 그런 시간을 꿈꾸어 볼 뿐이다.
글 : 전명원 (작가, 에세이스트) 저서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