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중에서…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사라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영원할 수 없어 고귀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늘 잊고 산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음이 왔을 때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 떠난다고 상상하는 것도 힘든데 자기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우리는 눈을 가리고 죽음을 반쯤 부정하면서 살아간다.
조력사(assisted death)를 택하는 사람들이 흔히 대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품위 유지이다. 그런 죽음에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그럴싸한 이름까지 붙여준다. 품위 있게 죽으려면 그런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과 모욕감’을 몹시 두려워한다. 다른 이는 먹는 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거나 뒤처리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걸 두려워한다.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별 거리낌 없이 도움을 받으면서도 흔히 그런 상황이 우리의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여긴다.
우리는 임종 과정의 여러 요소를 계획할 수 있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듣고 싶은 음악과 시신 처리 방법을 미리 정해둘 수 있다. 죽어가면서 조력을 받을지 내 손으로 약물을 마실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과 절차를 선택했다고 해서 내가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니다. 죽음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전히 착각이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는 게 점점 쉬워지는 것 같다. 또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내 가치가 훼손됐다고 여기지 않게 되었다. 자율성은 육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난민과 전쟁 포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몸이 갇힌 상태에서도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고수할 수 있다. 그게 진정한 자기 결정권이다.
이런 일이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 모두에게 벌어진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에 속한다. 이것은 삶의 한 부분이요, 살아가는 방식의 한 부분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왜 고개를 돌리려 하는가?
우리는 죽음 계획서를 미리 준비할 수 있다. 미리 준비하면 일단 마음이 편하고 뒤에 남은 사람들이 황망한 상태에서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부담도 덜 수 있다.
어디서, 어떻게 죽으면 좋을까? 당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죽음을 계획하라
가족과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한 폴더에 보관해두는 게 좋다. 편지는 장황하거나 멋지게 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작별 인사에 한두 마디 조언이나 격려를 덧붙이면 된다. 해가 바뀔 때마다 편지를 새로 써라. 당신의 부고를 직접 작성해도 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샐리 티스데일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