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중에서…
예를 들어 우리가 산다는 것은 결국 나만의 집을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기질이 집을 짓는 터라면 성격은 그 집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즉 2층인지 1층인지, 벽돌집인지 통나무집인지를 상징한다. 한편 심리는 지금 그 집을 어떻게 인테리어했는지를 살피는 것이고, 대인관계는 이웃집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나아가 스트레스 대처 역량은 집을 짓고 난 후에 다시금 어디에 문제점은 없는지 살피는 것에 해당한다. 이때 명리학은 무엇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좀 더 원석과 같은 잠재 능력을 알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마치 지하실이나 다락방에서 그동안 모르고 있던 선대의 유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명리학의 기본은 나의 생년월일시를 가지고 자연의 기를 상징하는 오행으로 전환해 그 오행의 상호작용으로 나를 아는 것이다. 그런데 그 다섯(五) 가지 특성은 고착된 것이 아니라 행(行)으로 변화한다. 즉, 명리학은 내 명(命)의 이치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기를 알고 거기에 따른 합당한 노력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것이 명리학의 기본 사상인 것이다.
내가 태어난 그 순간의 우주의 기가 내 몸에 들어와 나를 이룬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생일이 바로 나를 이루는 우주적 기의 상징이다. 그것이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과 서양의 가장 큰 시각 차이기도 하다.
삶에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가? 바로 나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흔히 바다는 메워도 인간의 욕심은 못 채운다고, 인생사 여러 문제는 바로 이 욕심과 기대치 때문에 생겨난다.
명리학은 우리로 하여금 내게 일어난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게 해준다. 흔히 ‘수용’이라고 하면 마치 수동적인 자세로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수용이란 과거의 내 모습이 어찌 됐든 그것은 이미 흘러간 것이고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사례를 통해 본 사람도 자신의 실수를 수용하면서 현재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운명이라는 한자어도 알고 보면 매우 흥미롭다. ‘움직일 운(運)’에 ‘목숨 명(命)’으로 운명 역시 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그 변화를 기록한 것이 운이다. 즉, 운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명체로서 매 순간 변화하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삶도 그 흐름이 같은 경우는 없다. 그것이 운명이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자연의 운명 외에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도 그것을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자기를 발전시키려 노력하면 그 운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다. 왜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까? 아마도 그분 역시 자유의지에 따라 신을 찾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수동적으로 순종하는 것보다는 능동적으로 신을 찾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명론은 반만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성격이 운명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는 정말 맞는 말이다. 위기의 순간에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사례는 너무도 많다. 더불어 나는 우리의 성격을 만드는 동인 중 하나가 심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두고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판단력은 그의 운명의 영향을 받는다”라고 묘사했다. 한 개인의 결정력에 영향을 미치는 첫 번째 요소는 그가 타고난 기질이다.
두 번째로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성격이다. 성격이란 자신의 기질을 바탕에 두고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삶의 해결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소는 그 시점에 느끼는 그의 마음 상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서 있는 인간, 즉 천지인(天地人)으로서 내가 첫 호흡에 들이마시는 우주의 기로 나를 안다는 것만큼 신비로운 학문이 어디 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꿀 순 없으나 나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는 있다. 즉, 자신의 불운한 운명을 한탄만 하고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의미다.
내게 좋은 운이 들어온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운이 들어온다고 해서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내 마음이 건강하면 외부에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웬만큼 견딜 수 있다. 인생의 고비마다 찾아오는 어려움에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 그런 생각과 자세를 갖는 것이야말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어준다. 즉, 심상(心像)을 갈고닦고자 노력할 때 운명도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처럼 내 몸의 세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매 순간 바뀐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타고난 운명 역시 반드시 그대로 지속되리라는 법은 없다.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흔히 ‘타고난 사주는 못 바꿔도 팔자는 바꿀 수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팔자를 이루는 오행 속 기의 흐름을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실제로 임상에서 그러한 사례들을 많이 본다. 이론적으로는 안 좋은 사주를 갖고 있어도 자신이 노력하여 큰 성취를 이루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인 사람도 정말 많다.
팔자를 바꾸려고 할 때 노력만큼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심상, 즉 내 마음의 흐름과 그 영향을 살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주를 타고나도 그것을 갈고닦으려는 심상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좋은 사주의 운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
사주가 강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활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힘이 센 사람은 운동을 하든지 해서 그 기를 발산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추운 사주를 가진 사람은 마음에 따뜻함을 더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 차가움을 녹여내야 하고, 더운 사주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조금 가라앉히려고 노력함으로써 자기 인생에서 조화와 균형을 맞춰나갈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자신의 삶을 디자인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사주는 바꾸지 못해도 팔자는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현재 이 시점에서부터 시작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늘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삶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심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사주를 갖고 태어났어도 그것을 갈고닦는 심상을 지닌 사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늘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면서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자기 삶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명리심리학 | 양창순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