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은 죽령은 죽죽 떨어진다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문경은, 경사스러운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고장이었으니 그 험한 길도 과거급제를 위해 마다하지 않았던 모양.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험에 대한 우리네 민족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새재는 예전에 가본 길이 있어서 이번에는 새재가 아닌 문경을 보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문경은 관광자원이 의외로 많았고, 나름 스토리를 입혀 잘 개발도 하였으며, 천성인지 교육의 산물인지 알 수 없으나 관광지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친절했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실, 등산을 못하는) 우리는 모노레일을 타고 단산 꼭대기에 올라 주변 백두대간을 둘러본다.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무인 모노레일에 오르면 배경음악으로 은하철도 999가 나와서 웃었다. 문경의 역사와 관광지에 대해 설명도 하며 편도 30분이나 소요되는 모노레일을 타게 되는데 경사가 상당해서 거의 누워가는 구간이 여럿이다.
아래와 달리 정상에 오르니 바람에 몸이 휘청일 지경이었다. 활공장을 겸하고 있는데 어쩐지 패러글라이딩 없이도 날아갈 것 같은 무서운 바람이다. 활공장 가운데, 그 거센 바람 속에 잠시 서서 아득한 산아래와 하늘과 먼 백두대간들을 둘러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새파란 망망대해에 떠있을 때처럼 잠시 아득함과 현기증, 그리고 뒤이어 막막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손 닿는 곳이 없고, 잡을 수 없는 먼 곳 뿐이라는 두려움이 아마도 이런 것일 테다.
가은 역은 폐역이 되어 그대로 카페로 변신했다. 자주 낚시를 다니는 정선의 별어곡역도 비슷한데 그곳은 화물차라도 지나가는 역이어서인지 없어지지 않고 전시관으로 바뀌었던데, 이곳은 아마도 화물차도 지나지 않는 모양이다. 선로와 기차역이 그대로 바뀌지 않고 카페가 되어서 독특한 레트로 공간이다. 문경 특산품인 사과향 가득한 사과차가 일품이었다.
어쩌다 보니 뒷자리의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두 자녀를 데리고 온 가족의 대화를 몇 마디 건너 듣게 되었다. 아마도 아이들이 원한 게 아닌데 아버지는 아이들을 꼭 여행에 데리고 오고 싶었는지 아이들은 뿌루퉁해있었고, 아버지는 기분을 풀어주려 애쓰는 형국이었다.
-어때, 오니까 그래도 좋지?
아버지의 말에도 아이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뭐, 그렇긴 해요.
아버지가 뒤이어 말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빠는 벌써 십만 원이나 썼어. 고기도 먹으러 갈 거잖아. 오늘 돈 많이 썼으니까 재미있게 놀다 가자, 응?
아이고, 아버님! 하고 외칠 뻔했다. 아이들도, 부인도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다음 행선지로 움직이는 동안 그 아버지 이야기를 생각했다.
한참 교육비 많이 들고, 아이들은 가족보단 친구와의 재미가 더 다가올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하고 싶었을 텐데 내 생각엔 접근하는 대화방식은 맞지 않은 듯했다. 경제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아버지도,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하고픈 아버지도 모두 이해는 되었다.
그 가족이 남은 하루는 즐거운 여행을 하기 바랐다. 경사스러운 소식까지 아니어도, 문경을 여행하던 그날을 떠올릴 땐 아, 그래도 그날 좋았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문경은 새재만 생각했지만, 의외로 도자기가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 찻사발.
정호다완을 들은 적 있는지라 연말까지 하는 찻사발 전시회를 늦지 않게 가려고 하던 참에 문경에서도 찻사발과 도자기를 구경하게 되어 반가웠다.
크지 않은 규모지만 알차게 꾸며놓았고, 외부엔 망댕이 가마도 전시되어있었다.
문경 근처에는 도요가 상당히 많아서 놀랐다. 예전 도자기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몇백 년 전의 도자기들은 놀랍도록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디자인들이 많다. 유행이 돌고 돌아서 몇백 년도 도는 것인지, 아니면 몇백 년 전부터의 역사가 이어지므로 현대적이라는 것은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어져온 것이기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후자에 더 가깝지 않을까.
문경과 점촌은 이웃이다. 점촌에 5일장이 섰고, 주변 인도는 장터로 변신했다.
장터의 술렁임, 흥정하며 오가는 말씨름, 낯익은 예전 먹거리들. 나는 엄마 따라 시장 가는 걸 좋아하던 아이였다. 바닥에 물이 흥건하던 생선골목, 어묵반죽을 기계보다 더 빠르게 덜어내어 튀겨내던 아저씨의 손놀림, 닭이며 동태를 손질해주실 때 두툼한 나무도마 위에 탕탕탕 내려치며 토막을 내던 소리들.
시장에 오면 아련하다.
스타벅스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있는 듯하다. 어딜 가도 스타벅스는 있었는데, 사실 스타벅스 커피맛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별달리 대안이 없거나, 독특한 관광지 콘셉트의 스타벅스가 있으면 들어가 본다.
문경새재 앞의 스타벅스는 한옥이다. 심지어 2층엔 좌식테이블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칸막이는 전통 창살무늬를 응용했다.
오픈과 동시에 들어갔더니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곧 뒤이어 모닝커피를 마시려는 사람들 발걸음이 이어졌다. 역시 스타벅스.
문경과 안동은 역사가 기반인 관광지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지난여름 다녀온 안동은 역사 오랜 것들이 많으니 보고 가세요,라고 이야기했다. 반면 문경은 거기에 얹어, 좀 더 보고 가게끔 많이 다듬었으니 이곳도, 저곳도 편하게 보세요,라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편의 시설도 잘 갖추어져 있었으며 관리 역시 잘 되어있었다.
소도시의 정겨움도, 편안함도 얹어져서 참 좋았던 문경 여행. 이름에 어울리는 도시다.